파시조(派始祖) 근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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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조(派始祖) 근녕군

btn_1.png파시조 근녕군(派始祖 謹寧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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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녕군 묘역

 ● 탄생(誕生): 1401년(태종원년, 신사(辛巳))

 ● 별세(別世): 1461년(세조6년, 신사(辛巳)), 61세

 ● 휘(諱: 생전의 이름): 농(襛)

 ● 시호(諡號: 사후에 공덕을 기려 임금으로 부터 받은 이름)

      희의공(僖懿公)

 

■배(配): 태안군부인(泰安郡夫人) 하양허씨(河陽許氏), 1461년(세조 6) 졸(卒), 황해도(黃海道)관찰사(觀察使) 증(贈) 찬성(贊成) 허지혜(許之惠)의 딸이다.

조부(祖父)는 개성유수(開成留守) 천각(天珏), 증조(曾祖)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외조(外祖)는 전공판서(典工判書) 남양인(南陽人) 홍사원(洪師瑗)이다.

 

태종대왕의 8남으로 신빈신씨(信嬪辛氏, 본관: 영월) 소생이다.

배위는 태안군부인(泰安郡夫人) 하양허씨(河陽許氏)로 황해도 관찰사 증 찬성(贊成) 지혜(之惠)의 딸이다.

3남 6녀를 낳으니 장남은 옥산군(玉山君) 제(躋), 차남은 우산군(牛山君) 종(踵), 3남은 달천정(達川正) 윤(踚)이다. 차남 우산군은 친형인 온녕군(溫寧君)의 후(後)로 출계(出系)하였고, 3남 달천정(達川正)은 후사(後嗣)가 없다.

장녀는 직장(直長) 영산인(靈山人) 신상하(辛尙夏)에게, 차녀는 감찰(監察) 광산인(光山人) 김현뢰(金賢賚)에게, 3녀는 부정(副正) 하동인(河東人) 정석년(鄭錫年)에게, 4녀는 군수(郡守) 증 참의(參議) 東萊人) 정수(鄭穗)에게, 5녀는 부사(府使) 증 도승지(都承旨) 김희(金僖)에게, 6녀는 판관(判官) 광산인(光山人) 정윤공(鄭允功)에게 출가했다.

 

처음 정윤(正尹)에 봉해졌다가 1424년(세종 6) 10월 근녕군(謹寧君)에 봉해지고, 세종대왕을 도운 공으로 익사공신(翊社功臣)으로 녹훈되었다. 1426년(세종 8)에 가정대부(嘉靖大夫)로, 1428년(세종 10) 7월에 종1품(從一品) 군(君)으로, 1430년(세종 12) 12월에 정1품(正一品) 군(君)으로 승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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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녕군 신도비(정면, 후면)

신도비 정면에 “朝鮮國宗室謹寧君僖懿公諱襛神道碑(조선국종실근녕군희의공휘농신도비)” 라고 쓰여 있고, 후면에는 파시조 근녕군에 대한 행적이 새겨져 있음.

어려서부터 시예(詩禮)를 좋아하고, 덕행이 있어 영예(令譽)가 일찍부터 나타났으며 겸손하여 양녕, 효령 두 대군의 지덕에 난형난제라 일컬었다. 단종대왕이 손위(遜位)할 때 종실백관이 모여 동맹하는데, 혼자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맹훈하는 책에 서명하지 않고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14일간 절식하며 통곡하였다.

 

1461년(세조7) 11월 15일에 “예장(禮葬)을 받지 말라”고 유언하고 향년 61세로 별세하였다. 세상에서 6종영(안평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하령군)에 둘만하다고 하였다. 현손인 원굉(元紘, 근녕군5세))의 상소로 그 큰 충성과 공업(功業)이 종친 중에서 으뜸이었다는 비답(批答)이 내렸다. 1872년(고종9)에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봉되었다.

 

묘소(墓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7번지 갑좌에 있다.

부군의 사당인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월랑리 의덕사(懿德祠)에서 봉사하며,

공주시 동학사 경내의 숙모전(肅慕殿)과 영광군 덕림사(德林祠)에 위패를 모시고 향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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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덕사

■ 의덕사(懿德祠): 근녕군(謹寧君) 증시(贈諡) 희의공(僖懿公)의 사당.

위치 : 충남 아산시 음봉면 월랑리(장수마을) 산 101번지

 

근녕군 5세 종손인 원굉(元紘)은 1492년(성종23)에 출생하여 사헌부 집의,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지제교의 관직에 봉직하였고, 그의 계자(繼子) 자헌대부(資憲大夫) 책(策)은 1541년(중종36)에 출생하여 명종 중기부터 광해군 말기까지 대도호부사 겸 진관첨병마절제사 등 관직에 봉직하였으며 임진왜란의 전란에 공을 세워 호성원종훈 1등공신에 봉하고 병조판서 판의금부사에 추증되었는데,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의 네 번의 옥사인 4대 사화에 이어 1547년 (명종2)에 정미사화가 일어나 수많은 조정 대신과 척신들이 숙청되고 참혹한 화를 입는 난세를 겪으면서 예측할 수 없이 시국이 불안하여, 책(策)의 어린 아들 중복(重福)의 신변안전을 위해 어머니 정부인 한산이씨와 함께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 전동면 송정리 소골(巢谷)마을로 낙향(落鄕)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종가 일가가 이곳을 중심으로 정착하게 되었고 인근의 구리골(銅谷)에 사당을 지어 종손 대대로 봉사(奉祀)하여 오다가 봉사손인 병욱(炳旭 근녕/18세)이 젊어서 죽고 어린 고아만 남아 이후 종손 일가의 가세가 몰락하여 외지로 유랑하게 되어,

1959년(己亥) 가을에 후손 우상(右相, 근녕/17세)씨가 충남 아산시 음봉면 월랑리(장수마을) 자택으로 봉안(奉安)하고 이듬해 자기 소유 땅에 자담으로 사당을 짓고 해마다 명절(설, 추석 2회)에는 마을 후손들이 모여 차례를 올리고 기신제(양위 2회)는 전국 각처의 종현들이 참사하여 봉행함에 이 모두 봉사손인 우상씨가 자비로 제물을 차리고 타 지역에서 오는 참사원들의 숙식까지 제공하였으며 1977년 지금의 사당을 신축 이안(移安)하여 파종회 주관으로 봉행하기까지 19년간을 홀로 봉사(奉祀)하였다.

 

1976년, 서울 신림동의 태안군부인 하양허씨(泰安郡夫人 河陽許氏, 근녕군 配位) 묘소 아래 위토가 도시개발지구로 편입되므로 보상금을 받게 되어 행방불명된 종손 일재(一宰)의 가족을 찾아서 충남 아산시 음봉면 월랑리에 집과 위토를 마련하여 정착시키고 종의(宗意)를 모아 새로 사당을 짓기로 결정하였으나, 부지매입비와 건축비가 부족하여 부득이 후손 문중의 경철공파종회(敬哲公, 근녕군12세)소유의 선산을 분할(아산시 음봉면 월랑리 산101, 산102번지 2필지, 합630평)하여 사당 부지의 용도로 희사 받아 이곳에 사당(祠堂)과 재실(齋室)을 짓고 1977년 8월 20일 봉안하여 제를 올렸고 그 후로부터 설과 추석 명절에는 이 마을 후손들이 함께 모여 차례를 지내며 기신제는 파종회 주관으로 봉사(奉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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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모전(肅慕殿)

■ 숙모전(肅慕殿)

- 위치: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동학사 경내.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다. 숙모전(肅慕殿)은 단종(端宗)과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를 모신 정전(正殿)이 있고, 계유정란(癸酉靖難)에 원사(寃死)한 황보인, 김종서, 안평/금성대군등 宗室(종실), 그리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참형을 당한 사육신(死六臣), 생육신(生六臣) 그 외 많은 원혼 등 충의 절사를 모신 동무/서무(東廡/西廡)가 있다. 1728년(영조4)에 불에 타 1827년(순조27) 다시 세웠으며, 1904년(고종41)에 중건하여 고종으로부터 숙모전(肅慕殿)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현재 89위가 모셔져 있고(근녕군은 서무(西廡)41에 배향됨) 음력 3월 보름과 10월 24일에 추모제를 지낸다.

 

■ 덕림사(德林祠)

전남 영광군 홍농읍 단덕리 산 15 덕림마을에 있는 덕림사는 1978년 향중유림의 발의로 희의공(僖懿公) 이농(李襛), 덕은 이호, 성와 이승달 등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사우로서 매년 3월 18일에 향사하고 있다.